<찌라시 한국사>, 지은이·김재완 두번째 글
최전성기를 이끈 균형외교 달인 장수왕
광개토대왕으로부터 19세에 왕위를 물려받은 장수왕(長壽王, 재위 412~491). 이름부터 그의 장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와는 다른 방법으로 고구려의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394년에 태어나 19세에 왕이 된 후 무려 79년 동안 왕위에 머물면서, 말 그대로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끈 군주였습니다. 그의 일생을 다 다루긴 어렵지만 2가지 강렬했던 사건 위주로 살펴봅니다.
장수왕 재위 기간 중 주변국가의 왕위 교체 현황
백제는 7명, 신라 7명, 유연 7명, 북위 6명, 송나라는 국호까지 바뀌면서 총 9명의 왕들이 바뀌는 동안 고구려는 단 한 명의 보스 장수왕 뿐이었습니다. 대단합니ㄷ! 정말 긴 수명과 재위기간을 자랑합니다.
최괴의 바둑고수 승려 도림
이 당시 동북아 정세는 외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은 신라와 왜는 물론이고 송, 북위 등과도 외교관계를 이어가며 고구려를 견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북위가 백제의 제안을 고구려에 알려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는 이미 외교에서부터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이제 개로왕의 본심을 확인한 이상 장수왕도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되었습니다. 장수왕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백제 21대 왕인 개로왕은 바둑 덕후였다고 해. 장수왕은 국가안보회의를 마친 후 당대 최고의 바둑 고수라는 승려 도림을 은밀히 불렀습니다.
“준비는 되었느냐?”
“폐하! 소인의 미천한 재주를 귀히 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반드시 작전을 성공시키고 돌아오겠나이다.”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서도 안 되고, 티 나게 져주어도 안 될 터,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염려 마십시오. 소인, 접대 바둑의 일인자라는 소리를 괜히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장수왕의 특명을 받은 승려 도림은 백제로 위장 전입, 아니 위장 귀순을 하게 되고. 백제에 연착륙한 도림은 내로라하는 바둑 고수들을 찾아 도장 깨기를 시현했습니다. 그의 바둑 실력은 백제 바둑계를 초토화시키고, 순식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음은 물론이었습니다.
개로왕의 마음을 사다
바둑 덕후로 익히 알려졌던 개로왕이 이런 도림을 가만히 뒀겠어? 궁으로 당연히 불러들였지.
이렇게 시작된 바둑 덕후 개로왕과 고구려 스파이의 독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어. 마침내 개로왕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도림은 작전명 ‘알파고’의 실행버튼을 눌렀어.
도림에게 이미 큰 믿음을 갖고 있는 개로왕은 이날 이후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시작했고, 건설 현장마다 도림을 대동하여 테이프 커팅식을 했어.
백제 행정부처에서는 이런 결정에 반발하는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지만 개로왕은 귀를 닫고, 바둑에 더욱더 열중했어. 바둑으로 백제의 내분을 일으킨 도림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고구려로 리턴! 장수왕에게 업무보고를 했어.
치밀한 작전 백제를 집어삼키다
결국 장수왕은 3만 군사를 이끌고 나가,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단 7일 만에 함락시켰어. 개로왕은 고구려로 전향한 백제인의 손에 잡혀 아차산성(현재 서울과 구리시 사이)에서 처형을 당하고 말았어. 이때의 패배로 백제는 한강을 완전히 잃었을 뿐만 아니라 타의에 의해 수도를 이전하게 되었어.(현재 서울 풍납토성에서 충남 공주로 천도)
고구려의 대승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장수왕과 도림의 합작품인 ‘작전명 알파고’가 한몫을 했음은 《삼국사기》에 잘 나와 있어.
흔히 조공이라고 하면 무조건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사실 조공은 무역의 창구이자 외교적으로 잘만 이용하면 고급외교의 한 장이라고 볼 수 있어.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
자, 이제 시간을 4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 장수왕이 비교적 청년(?) 시절이었던 435년의 고구려 국가안보회의 현장으로 달려가보자고. 이때 장수왕 나이 41세였어. 참고로 《삼국사기》에 보면 장수왕이 강대국들에게 조공한 기록이 상당히 많다고 해. 이게 어찌된 일일까? 조공이라고 하면 무조건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사실 조공은 중국이 주변국을 상대하는 외교적 관계로 이해하는 게 맞아. 이 조공은 때로는 무역의 창구로 이용이 되기도 하고, 외교적으로 잘만 이용하면 피를 흘리지도 않고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고급외교의 한 장이라고 볼 수 있어. 장수왕은 그런 면에서 외교적으로 상당히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던 왕이야.
“어려울 때 손을 내민 자를 뿌리칠 수는 없다. 허나 북위는 중원의 패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선 북위에 사신을 보내 양해를 구하도록 하자. 그후에는 다시 강공책으로 전환할 것이다. 과감한 강공책을 편 후에는 다시 북위를 달래주는 걸로! 오늘 회의는 이걸로 마친다.”
결론
고구려는 우선 강대국 북위에게 양해를 구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어. 이어 이듬해 장수왕은 군사 3만 명을 북연의 수도에 파견을 했어. 북연의 황제를 고구려로 데려오기 위함이었지. 앞서 말했듯이 북연의 수도에는 이미 북위의 군사가 주둔을 하고 있었어. 북위 수뇌부는 고구려의 군사행동에 완전히 난리가 났어.
일부에서는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북방으로 뻗어 나갈 기회를 스스로 차단시킨 것 아니냐는 아쉬움과 원망의 의견도 있어. 이건 마치 무사 주자 1, 2루에서 3번 타자에게 번트를 시키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비슷하지 않을까? 번트 성공 후 4번 타자가 끝내기 안타를 치면 감독을 칭찬할 것이고, 번트 성공 후 후속타자 불발로 점수를 못 내면, 감독의 작전을 질타하겠지.